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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4·19혁명과 어머니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의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 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TS 엘리엇(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엇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엇은 미국 출생이었지만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먼과 제프리 차우서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깁기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생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뮤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류 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어머니 혁명 어머니 생각 여자 중학교 혁명 이전

2024-04-25

[수필] 어머니

매년 5월 두번째 일요일은 어머니날이다. 이런 날은 유독 어머니가 더 보고 싶어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어언 20년이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왜 해를 거듭할수록 더 선명하게 어머니 생각이 날까?   어머니는 17세에 6살 많은 5대 종갓집 장손인 아버지한테 시집 왔다. 아버지는 일곱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남동생과 함께 삼촌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부잣집 장손이었으나 나이 어린 탓에 두 삼촌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머슴처럼 살다가 어머니를 맞이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성인이 된 후에 두 삼촌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빼앗은 것을 알고 홧술을 매일같이 마셔 4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다. 어머니는 36세에 8남매를 거느리고 청춘과부가 된 것이다.     재산이라 곤 논 한 마지기와 밭 두 마지기, 방 두 칸 짜리 초가집이 전부였다. 맏이 누나는 동생들에게 밥숟가락이라도 덜어주고자 일찍 출가하였고 두 형은 머슴살이하였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항아리 장사를 하였는데 이른 봄에 타향으로 장사를 나가면 초겨울에나 집에 오셨다.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기 때문에 둘째 누나는 네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소녀 가장이 되어 엄마 노릇을 했다. 내가 아홉 살 때는 어머니가 큰 외삼촌과 동업으로 항아리를 장사를 나갔는데 외삼촌이 주색잡기에 빠져 빈손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우리는 3일 동안 물만 마시고 굶은 적이 있었다. 이때 어머니는 화병을 얻어 이마에  수건을 동여매고 며칠을 앓아누우셨다. 그 추운 겨울날 땔감조차 없어 차라리 양지바른 논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나갔는데 논둑에 어른 손바닥만 한 시루떡이 말라 비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곤 주워서 집에 왔다. 어느 집에선가 올해 농사 잘되게 해주십사 고사 지낸 떡이었다. 누나가 솥에 넣고 쪄서 같이 조금씩 나누어 먹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그 후 동네 매파 할멈이 어머니에게 부잣집 영감에게 재가하여 팔자 고치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다는 굳은 각오로 자식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기에 농사짓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공항동 시장 바닥에 좌판을 깔고 생선 장사를 하였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어머니한테 달려가 도와드렸다. 동창 여학생들이 어머니 손 잡고 시장에 오는 날이면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창피해서 숨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엄하게 키우셨는데 자식들에게 ‘애비 없는 호래자식’ 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게 처신하라고 늘 당부하셨다. 형제들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배우지는  못했지만 범법자로 죄짓고 교도소에 들락거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 형제 중 어머니는 유독 나에게 애착이 많으셨다. 아버지를 빼다 박은 붕어빵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가 우리 교실에 두 번이나 찾아오셔서 수업 참관을 한 적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복에 금빛 단추를 다시며 어머니가 콧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형제들에게 미안하게도 고생을 하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는데 대학원 졸업식장에서 어머니는 마치 당신 자신이 졸업이라도 하는 양, 사부인 앞에서 헛기침을 자주 하셨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오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둘째 아들 집에서 기거했는데 작별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애비야! 이 어미가 죽거들랑 묻고 가거라” 신신당부 하셨는데 어머니가 기력이 없어 누워 잠드신 틈을 타 어머니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도망친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돌이켜 보면 후회막심한 일이다. 어머니의 부탁을 뿌리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82세까지 사시고 내가 이민 온지 4개월 후인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제외한 우리 7남매가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내 이름을 부르며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젓고 운명 하셨단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못난 자식 놈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형제들은 내가 걱정한다고 알리지 않고 장례가 끝난 후에나 기별해 왔다. 나는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하숙방에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는데 주인집 할머니는 내가 기도하면서 우는 신앙심이 깊은 참된 신자로 오인하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는 희생과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이 아니겠는가?  불가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따르면 어머니는 우리를 낳을 때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낳아서는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준다고 한다.   그 어떤 어머니도 자식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어머니 살아생전에 효도를 못 해 드린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응어리진 채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어머니 어머니 이마 어머니 생각 이때 어머니

2023-06-22

[열린광장] 미리 써 본 나의 부고

모든 글은 재미있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도 예외 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조금은 유별날 것 같은 나의 부고를 미리 써봤다.     ‘1951년 여름, 철의 삼각지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무렵, 17세의 재현은 황해도 몽금포 고향 집을 떠났다. 어머니에게 약 30일 후 돌아온다고 약속했다. 하늘의 요새 B-29 폭격기 등으로 무장한 유엔군이 반드시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피난 간 곳은 남포 옆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던 작은 초도다. 이 섬에는 약 2000명의 피난민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재현은 이 작은 섬에서 소나무 세 개로 인디언 스타일 숙소를 만들고, 그 속에 마른 풀을 깔고, 냄비를 걸어 밥을 해 먹으며 혼자 살았다.     배급받은 안남미와  산나물, 바다에서 잡아 온 소라와 해삼으로 연명했다. 맑은 날에는 중국 청도가 보이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청정 지역에는 해삼이 지천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해삼을 실컷 먹고, 한 바구니씩 가져왔다. 그때 ’바다의 인삼‘을 많이 먹어서인지 재현은 90세까지 건강했다.     두 달이 지나도록 유엔군은 북상하지 못하고 38선에서 일진일퇴하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입고 나온 옷에서 보리알 같이 살찐 이가 꼬이기 시작했다. 낮에 모닥불을 피우고 옷을 벗어 털면 콩 볶는 소리와 괴상한 냄새가 풍겼다. 어머니가 끓여준 호박 된장국과 솜이불이 그리워 참을 수 없었다. 죽어도 어머니 옆에 가서 죽는다. 재현은 앞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북한으로 침투하는 반공 유격대 배를 타고 초도를 떠났다. 초도와 장산곶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선장이 소리쳤다. 여러분 저기 장산곶을 봐요. 저 검은 구름은 폭풍우가 온다는 징조입니다. 선장은 구름을 보고 기후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배를 되돌려 초도로 돌아갔다. 누구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 주 후 미 해군 상륙함정 LST가 와 섬의 피난민을 모두 군산으로 후송했다. 떠들썩했던 동해 흥남 철수 작전보다 조용한 서해 철수 작전이었다. 만약 그 검은 구름이 아니었으면 재현은 북한으로 되돌아갔을 것이고, 그의 인생은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좀 장황한 부고의 일부분이다. 나는 장미공원에 묘지를 마련하고, 아들이 첫 봉급을 받았다며 맞춰줬던 양복을 수의(壽衣)로 표시해 놓았다. 정부에서 생명보험이란 명목으로 장례비가 나온다. 아들이나 딸들이 허겁지겁 부고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떠날 준비를 다 했다. 할 일이 없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오후 나는 새알심을 넣고 따끈한 팥죽을 끓여 먹었다. 그리고 김훈의 장편 소설 ‘하얼빈’을 읽었다. 비가 그치면 밖에 나가서 ‘고향의 푸른 잔디’, ‘메기의 추억’, ‘선구자’, 등을 들으면서 걸을 것이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부고 어머니 생각 철수 작전 서해 철수

2023-04-17

[이 아침에] 눈먼 탕자의 길

가을 나무는 슬프고 찬란하다. 한여름 불타는 태양 속에 불에 댄 것처럼 사랑을 하고 가을에는 그 사랑을 미련 없이 등 떠밀어 보낸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빛과 색깔이 있을까. 가을은 신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렌지색과 빨강을 녹색의 팔레트에 풀고 하늘에 보라색 물감을 눈물방울로 떨어트린다.     곧이어 겨울이 도착하리라. 잎이 떠난 앙상한 가지들은 옛시인의 노래를 읊조리며 모진 계절을 견뎌낼 것이다. 나무들은 뿌리 깊숙이 한 점 숨겨 둔 옛사랑을 간직하며 공허한 세월을 추스른다. 새날은 기다리는 자에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수레바퀴로 팔랑개비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만이’더는 쪼개지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며 과거는 현재에 대한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에 대한 기대로 존재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새긴다. 사는 게 춥고 힘들어도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기다리며 인고하는 자에게는 소망의 빛으로 다가온다.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항금시대에 부와 명예로 유명세를 떨친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그림은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제라드 드 레이싱의 찬사처럼 렘브란트는 붓, 분필, 에칭용 조각칼을 사용하여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렘브란트(1606-1669) 작품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 눈은 초점이 흐려 있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멀게 된 것일까.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 장님이 된 걸까. 사랑은 눈이 멀기까지 누구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다. 아버지의 왼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 손이고 오른쪽은 매끈한 여자 손이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통해 화해와 용서, 치유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들의 샌들 한쪽은 망가지고 거의 벗겨져 있다. 왼발은 상처투성이다.     아버지 품을 떠나 얼마나 지독한 가난에 찌들었는지, 죄수같이 삭발한 머리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강을 건넌 뒤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돌아온 탕자’와 다름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렘브란트는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신분상승의 허영심과 자신의 ‘명성’에 도취해 저택을 구입하는 등 낭비벽이 심해지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태어난 자녀들이 연이어 죽는 불행이 연속되고 결국 파산해 빈민촌으로 쫓겨난 렘브란트는 6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에서 빛과 어둠을 통해’우리는 탕자의 길을 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Havenly(천국 같은)’로 전시회 제목을 정했다. 화랑 경영하며 30년 동안 남의 작품 파느라 그림을 못 그렸다. 돈독이 오르면 예술혼이 죽는다. 천국 가는 길이 있다면, 그 길섶에서 눈이 멀도록 불태워 사랑할 수 있다면, 불멸의 아름다움 담아 작별 인사하는 대평원의 나무들처럼, 탕자의 눈동자 속에서 우주는  찬란하게 빛날 것이므로.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탕자 마술사 렘브란트 가을 나무 어머니 생각

2022-11-27

[기고] 탐욕·분노·우둔이 일으키는 전쟁

신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를 읽다가 어머니 생각에 잠시 멍해 있었다. 왜 그러는지 묻는 도반 스님에게 “엄마 생각나서”라고 한마디 꺼냈다가 모친의 비극적 생애 한 조각까지 주절주절 읊고 말았다.   모친에겐 일찍이 전쟁 나간 남편이 있었다. 청상과부로 세월 가는 며느리가 안타까워 시어른이 나서서 내 부친에게 시집 보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련한 미소는 슬픔과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 훗날 전쟁 나간 남편이 북쪽에 살아있다는 소문을 듣고부터는 침묵도 길어졌다.     지나고 보면 대개가 기억에도 남지 않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전쟁이 낳은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생생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의 전쟁터만 해도 그렇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 임산부와 태아의 죽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피란 행렬.   죽음의 공포가 따르는 그 피란 행로가 얼마나 기막히고 고단할지 나는 짐작도 안 된다. 물론 세상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연민의 눈길도 많고, 전쟁을 그만두라는 외침도 많이 들린다. 그런데도 사람을 해치고 도시를 파괴하는 전쟁은 잔인하게 계속되고 있다.   돌아보면 고작 한 달 사이인데, 세상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에는 전쟁이 났고, 우리나라는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코로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때, 나 같은 보통의 종교인은 그저 두 손 모아 ‘세계평화, 국태민안’을 기도하며, 코로나에 지쳐 절에 찾아오는 이들을 토닥이는 게 최선이다.   단언컨대, 전쟁은 악업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어떤 전쟁도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겨우 살아낸 자에게는 고통만이 남았다. 침략국 군주들은 한결같이 도덕이 없어야 군사전략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어떤 이에게는 부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전쟁과 같은 크고 작은 중생계의 다툼과 갈등의 원인을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서 찾는다. 즉 ‘탐진치(貪瞋癡)’로 인해 생긴 갈등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표출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도 탐진치 세 가지 원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야 다르겠지만, 탐욕 하나만 하더라도 각자 내 나라를 이롭게 하려던 것이, 다른 한편에서는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인류가 행해온 수많은 전쟁과 다툼, 살육은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소통을 하고 상상력으로 문명을 개척하며 사회협동을 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극복하며 지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증명하듯 우리는 지금 네트워크에 의한 정보량도 충분하고, 서로 소통하며 협력하기도, 멀리서 응원하며 난민지원을 함께하기도 한다. 협력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 된다.   다만 불행하게도 전쟁을 막고 인류공영을 이루기 위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유엔)까지 만들어 협력해도 여전히 전쟁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역별로 경제블록도 만들고, 방위체제를 만드는 것도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에 의하면 “각 나라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면 할수록 실제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한다. 즉 전쟁에 대비하고자 더 좋은 무기를 만들수록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더 높아진다는 말이다. 뭔가 깊이 생각해볼 말이다.   아무튼 불교는 “중생의 번뇌가 끝이 없어도 그를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를 위한 우공이산(愚公移山) 말고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듯 보이더라도 한 삼태기씩 꾸준히 흙을 옮겨야 마침내 태산을 옮기듯, 평화를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 개인과 집단 모두 꾸준히 참고 노력해야만 약소한 나라의 생존을 약탈하면서 욕망을 채우는 일을 막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원영 스님 / 청룡암 주지기고 탐욕 분노 우크라이나 전쟁 훗날 전쟁 어머니 생각

2022-04-04

[기고] 탐욕·분노·우둔이 일으키는 전쟁

신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를 읽다가 어머니 생각에 잠시 멍해 있었다. 왜 그러는지 묻는 도반 스님에게 “엄마 생각나서”라고 한마디 꺼냈다가 모친의 비극적 생애 한 조각까지 주절주절 읊고 말았다.   모친에겐 일찍이 전쟁 나간 남편이 있었다. 청상과부로 세월 가는 며느리가 안타까워 시어른이 나서서 내 부친에게 시집 보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련한 미소는 슬픔과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 훗날 전쟁 나간 남편이 북쪽에 살아있다는 소문을 듣고부터는 침묵도 길어졌다.     지나고 보면 대개가 기억에도 남지 않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전쟁이 낳은 수많은 비극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생생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의 전쟁터만 해도 그렇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어머니, 임산부와 태아의 죽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피란 행렬.   죽음의 공포가 따르는 그 피란 행로가 얼마나 기막히고 고단할지 나는 짐작도 안 된다. 물론 세상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연민의 눈길도 많고, 전쟁을 그만두라는 외침도 많이 들린다. 그런데도 사람을 해치고 도시를 파괴하는 전쟁은 잔인하게 계속되고 있다.   돌아보면 고작 한 달 사이인데, 세상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에는 전쟁이 났고, 우리나라는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코로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때, 나 같은 보통의 종교인은 그저 두 손 모아 ‘세계평화, 국태민안’을 기도하며, 코로나에 지쳐 절에 찾아오는 이들을 토닥이는 게 최선이다.   단언컨대, 전쟁은 악업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어떤 전쟁도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겨우 살아낸 자에게는 고통만이 남았다. 침략국 군주들은 한결같이 도덕이 없어야 군사전략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어떤 이에게는 부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전쟁과 같은 크고 작은 중생계의 다툼과 갈등의 원인을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서 찾는다. 즉 ‘탐진치(貪瞋癡)’로 인해 생긴 갈등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표출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도 탐진치 세 가지 원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야 다르겠지만, 탐욕 하나만 하더라도 각자 내 나라를 이롭게 하려던 것이, 다른 한편에서는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인류가 행해온 수많은 전쟁과 다툼, 살육은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소통을 하고 상상력으로 문명을 개척하며 사회협동을 하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극복하며 지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를 증명하듯 우리는 지금 네트워크에 의한 정보량도 충분하고, 서로 소통하며 협력하기도, 멀리서 응원하며 난민지원을 함께하기도 한다. 협력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 된다.   다만 불행하게도 전쟁을 막고 인류공영을 이루기 위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유엔)까지 만들어 협력해도 여전히 전쟁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역별로 경제블록도 만들고, 방위체제를 만드는 것도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에 의하면 “각 나라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면 할수록 실제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한다. 즉 전쟁에 대비하고자 더 좋은 무기를 만들수록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더 높아진다는 말이다. 뭔가 깊이 생각해볼 말이다.   아무튼 불교는 “중생의 번뇌가 끝이 없어도 그를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를 위한 우공이산(愚公移山) 말고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듯 보이더라도 한 삼태기씩 꾸준히 흙을 옮겨야 마침내 태산을 옮기듯, 평화를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 개인과 집단 모두 꾸준히 참고 노력해야만 약소한 나라의 생존을 약탈하면서 욕망을 채우는 일을 막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원영스님 / 청룡암 주지기고 탐욕 분노 우크라이나 전쟁 훗날 전쟁 어머니 생각

2022-04-01

[독자 마당] 어머니 생각

산 안개가 뽀얗게 피어 있는 이른 아침 아들 내외와 같이 모처럼의 산행에 나섰다. 라 투나산 야트막한 봉우리에 올라서서 걸어왔던 길과 건너편 골짜기를 차례로 둘러본다. 갑자기 50년 전에 열차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안개 속에 아련하게 떠오른다.   나는 아들 내외에게 먼저 올라가라며 3시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의 제안에 아들 내외는 앞질러 사라졌다.     나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우리는 바위 끝에 나란히 앉았다.   내가 초등학교 오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과외 수업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오는 날이었다. 사방에 인가라곤 없는 산골 길에서 좁은 길을 찾느라 엎드려서 손으로 더듬더듬 하다가 도랑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오지를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어두운 밤 산골 길을 걸어 올 아들의 귀가를 염려해서 마중 나오신 것이다. 무서운 산짐승과도 여러 번 스쳤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내 이름을 목청껏 몇 번이고 부르셨다고 한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다. 80여년의 긴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까지도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혼잣말로 자꾸만 어머니를 부르자, 옆에 앉아있던 아내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끌듯이 손을 잡아 일으키며 등산을 재촉한다.   어머니의 깊은 자식 사랑은 이 세상 어느 것으로 끊을 수 없는 천륜이라고 한다. 산수(80세)를 훌쩍 넘긴 이 아들의 마음 한복판에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 계신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몹씨 저려 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이상두·라크레센타독자 마당 어머니 생각 어머니 생각 그때 어머니 아들 내외

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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